숫자를 싫어하는 아이가 사과로 원주율을 구했습니다 (3.14가 안 나왔지만요)
처음엔 지름을 두 배로 쟀습니다. 틀린 게 아니라 다음 실험이 생긴 거예요
단단랩
2026. 10. 30

Executive Summary (요약)
목적은 정답이 아니었습니다. 숫자를 싫어하는 아이가 숫자를 손으로 만나보게 하는 것이었어요. 그래서 사과와 배를 꺼내 줄자로 쟀습니다. 첫 계산은 틀렸고(아이가 지름을 실제의 두 배로 재놨어요), 다시 재서 3.33쯤을 얻었습니다. 3.14는 아니죠. 그런데 그날 남은 건 숫자가 아니라 "재봤다"는 경험이었습니다. 스스로 만들어낸 것과 직접 해본 것이 더 오래 남는다는 연구도 함께 적었습니다.
① 문제집은 정말 하기 싫어합니다
구름이는 연산 문제집을 정말 하기 싫어해요. 10분 앉히는 것도 일입니다.
그런데 이상한 게 하나 있었어요. 박물관에서 십자말풀이를 할 때는 밥도 안 먹고 끝까지 했습니다. 검사에서도 "쉬운 문제는 지루해서 안 풀고, 어려운 문제는 끝까지 풀어 맞힌다"는 소견이 나왔고요.
그러니까 싫어하는 건 숫자가 아니라 문제집의 형식일 수 있겠다 싶었어요. 그래서 부엌으로 갔습니다.
② 목적은 정답이 아니었습니다
부엌으로 가면서 제가 정한 건 하나였어요. 오늘 3.14를 알게 하지 않는다.
원주율을 외우게 하려는 게 아니었습니다. 이 아이가 숫자를 만나는 자리가 문제집뿐인 게 문제라고 생각했거든요. 문제집에서 숫자는 맞히거나 틀리는 것입니다. 그러니 숫자가 싫어질 수밖에요.
그래서 목표를 이렇게 잡았습니다. 숫자를 손으로 한번 만나보게 하는 것. 답이 맞든 틀리든 상관없이요.
③ 사과를 꺼냈습니다
준비물은 셋뿐이었어요. 과일 하나, 줄자, 종이. 저희는 사과와 배로 한 번씩 했습니다.

- 사과를 종이에 대고 마커로 윤곽을 그렸습니다
- 줄자로 사과 둘레를 감아서 쟀습니다
- 종이에 그린 원의 가운데를 가로질러 선을 긋고 지름을 쟀습니다
- 둘레 ÷ 지름을 계산했어요

여기서 짚어둘 게 있어요. 원주율은 둘레를 지름으로 나눈 값입니다. 반지름이 아니라요. 그래서 반지름을 쟀다면 두 개를 더해 지름을 만든 다음 나눠야 합니다.
④ 처음엔 틀렸습니다
첫 계산은 맞지 않았어요. 아이가 지름을 실제의 두 배로 재놓고 계산했거든요.
자를 대는 위치가 어긋났는지, 반지름과 지름을 헷갈렸는지는 지금도 확실하지 않습니다. 확실한 건 숫자가 두 배로 들어가 있었다는 것뿐이었어요.
여기서 어른이 하기 쉬운 말이 있습니다. "틀렸잖아. 다시 해."
그 말 대신 저희는 다시 쟀습니다. 처음부터 잘못 잰 게 아니라 어디를 잘못 쟀는지 찾아서 그 부분만 다시 잰 거예요.
그리고 다시 계산하니 3.33쯤이 나왔습니다. 배로 해도 사과로 해도 비슷했어요.
⑤ 3.14는 아니었습니다. 그게 좋았어요
우리가 아는 원주율은 3.14죠. 3.33은 그보다 조금 큽니다.
남은 차이는 재는 일 자체의 한계 때문이에요.
① 사과는 완전한 원이 아닙니다. 위아래가 눌려 있고 옆면도 울퉁불퉁해서, 어디를 감느냐에 따라 둘레가 달라집니다. 배는 더하고요.
② 줄자가 곡면에서 뜹니다. 저희가 쓴 건 딱딱한 강철 줄자였어요. 뻣뻣해서 둥근 면에 딱 붙지 않고 살짝 들뜨는데, 그만큼 둘레가 실제보다 크게 나옵니다.
③ 종이에 그린 윤곽이 사과보다 작을 수 있습니다. 사과를 대고 돌려 그리면 마커를 완전히 수직으로 세우기가 어렵거든요.
그러니까 3.33은 아이가 못해서 나온 숫자가 아니라, 손으로 재면 나올 수 있는 숫자였습니다. 반대로 말하면 3.14는 아주 정밀하게 재야 나오는 값이라는 뜻이기도 하고요.
⑥ 아이가 제일 신기해한 게 이 지점이었습니다
숫자가 안 맞은 게 문제가 아니었어요. 오히려 틀린 걸 찾아서 다시 재는 동안 아이가 제일 재미있어했습니다.
생각해보면 당연해요. 답이 정해진 문제를 푸는 것과 답이 왜 다른지 알아내는 것은 다른 일이니까요. 뒤쪽이 훨씬 어려운데, 아이는 어려운 걸 더 좋아하는 쪽이었거든요.
💡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더 오래 남습니다
스스로 만들어낸 정보는 읽기만 한 정보보다 더 잘 기억됩니다. 86개 연구를 모은 메타분석에서 효과크기 .40 — 표준편차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이점이에요.
직접 해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. 행동을 직접 수행하며 배운 것은 듣거나 남이 하는 걸 본 것보다 더 잘 기억되고, 이는 아동 대상 연구에서도 확인되었습니다.
근거: 생성 효과 메타분석, Memory & Cognition → · 실행 효과 개관, Frontiers in Psychology →
문제집에서 "원주율은 3.14입니다"를 읽는 것과, 사과를 직접 감아서 나온 숫자를 나눠보고 틀린 데를 찾아보는 것은 남는 게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.
⑦ 다음에 해볼 것 (아이에게 이미 말해뒀어요)
"틀렸다"로 끝내지 않으면 할 일이 생깁니다. 저희가 다음에 해볼 것들이에요.
- 실이나 종이테이프로 감았다가 펴서 재기 — 곡면에 딱 붙습니다. 강철 줄자의 문제가 해결돼요
- 사과를 두 권의 책 사이에 끼우고 책 간격을 재기 — 종이 그림이 아니라 진짜 지름을 잽니다
- 더 큰 물건으로 해보기 — 접시, 냄비 뚜껑, 자전거 바퀴. 클수록 몇 밀리의 오차가 차지하는 비율이 줄어서 3.14에 가까워집니다
- 여러 개 재서 나란히 적어두기 — "어떤 게 제일 3.14에 가까웠어?"
마지막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. 하나만 재면 숫자 하나지만, 여러 개를 재면 패턴이 보입니다.
⑧ 집에 있는 것으로 하는 숫자 놀이
원주율까지 안 가도 됩니다. 저희가 쓰는 것들이에요.
- 주사위 두 개 — 굴려서 나온 수로 가장 큰 수 만들기, 합이 10 넘기기
- 카드 1~20 — 뒤집어 놓고 연속된 수 찾기, 두 장 합이 15 만들기
- 마트에서 — "1000원으로 살 수 있는 거 찾아봐"
- 요리할 때 — 계량컵, 몇 분 남았는지 세기
- 어려운 문제 하나 — 쉬운 문제 10개보다 어려운 문제 1개. 못 풀어도 된다고 먼저 말해주기
공통점이 하나 있어요. 정답 개수를 세지 않는다는 겁니다. 세는 순간 문제집이 됩니다.
⑨ 남는 건 숫자가 아니라 말입니다
그날 나온 3.33은 사실 중요하지 않아요. 애초에 정답을 맞히려고 한 일이 아니었으니까요.
남는 건 아이가 "왜 안 맞지?" 하고 들여다본 표정, 사과에 줄자를 감아본 손의 감각 같은 것들입니다. 언젠가 교과서에서 원주율을 만났을 때 "아, 그거 해봤는데" 하고 떠올릴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.
그런데 그런 건 정말 금방 잊어버려요. 그래서 저는 단단 스토리에 한 줄씩 남깁니다. 몇 개 맞았는지가 아니라 아이가 한 말을요.
보상 없이 아이가 숫자에 붙게 하는 방법은 공부 보상, 계속 줘도 될까요?에 따로 적었습니다.
본 글은 저의 개인적인 경험과 정보 공유이며, 교육적 진단이나 처방이 아닙니다. 아이마다 반응이 다르며, 아이의 학습이 걱정된다면 담임 선생님이나 전문가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.
📚 참고자료 · 함께 보면 좋은 자료
- Bertsch 외, The generation effect: A meta-analytic review — Memory & Cognition
- Using actions to enhance memory: effects of enactment, gestures, and exercise on human memory — Frontiers in Psychology
- 공부 보상, 계속 줘도 될까요? 보상을 끊지 않고 옮겨보는 4주
자주 묻는 질문 (Q&A)
Q. 원주율은 둘레를 반지름으로 나누는 건가요?
A. 지름으로 나눕니다. 둘레 ÷ 지름이 약 3.14예요. 반지름으로 나누면 그 두 배인 약 6.28이 나옵니다. 저희 아이가 처음 틀린 것도 이 지점과 닿아 있었어요. 지름 자리에 들어갈 숫자가 실제의 두 배였거든요. 반지름을 쟀다면 두 개를 더해 지름을 만든 뒤 나누면 됩니다.
Q. 아이가 잘못 재서 답이 안 맞으면 어떻게 하나요?
A. 저는 "다시 해"라고 하는 대신 "어디를 잘못 쟀을까?"를 같이 찾았어요. 저희 아이는 지름을 두 배로 재놨더군요. 틀린 데를 찾아 그 부분만 다시 재는 과정이 사실 처음 재는 것보다 재미있었습니다. 답이 안 맞는 게 실패가 아니라 다음 실험의 시작이 됩니다.
Q. 몇 살부터 할 수 있나요?
A. 저희는 초등 1학년과 했습니다. 나눗셈을 못 해도 괜찮아요. 재는 것까지만 아이가 하고 나누는 건 어른이 계산기로 해도 됩니다. 핵심은 계산이 아니라 "둥근 것은 항상 이 정도 비율이더라"를 손으로 겪는 것이라고 생각해요.
단단 스토리로 지금 시작하세요
문제집은 정말 하기 싫어하는 아이입니다. 그래서 사과와 배를 꺼내 줄자로 쟀어요. 목적은 정답이 아니라 숫자를 손으로 만나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. 3.14는 안 나왔지만, 그날 남은 건 숫자가 아니라 재봤다는 경험이었어요.
단단 스토리 바로가기